1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요구함으로써 발전에 방해를 받는다. 이것은 실제로 박탈에 매달리는 방법이다.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알기 위한 수업의 지시 사항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너에게 이 수업이 필요하다는 점은 너의 거부에 함축되어 있다. 앎은 이 수업을 배우기 위한 동기가 아니다. 평화가 그 동기다. 앎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평화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 이유는 단지 갈등하는 자들은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는 천국의 조건이므로, 앎의 조건이다.
2 네가 앎의 조건들을 충족할 때, 앎은 회복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내거시는 흥정이 아니다. 그분은 전혀 흥정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단지 네가 하느님의 법칙을 그분의 뜻이 아닌 그릇되게 사용한 결과에 불과하다. 앎은 정녕 하느님의 뜻이다. 네가 만약 그분의 뜻에 맞서고 있다면, 어찌 앎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앎이 너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지 말해주었지만, 너는 분명 이것을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여긴다면, 에고가 충성을 요구할 때 앎을 그렇게 쉽사리 던져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고의 방해는 너의 배움에 지장을 주는 듯이 보이지만, 네가 에고에게 그럴 힘을 부여하지 않는 한 에고는 너를 방해할 힘이 전혀 없다.
3 에고의 음성은 일종의 환청이다. 에고가 "나는 실제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환청은 실로 실재에 대한 부정확한 지각이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환청을 혼자 쫓아버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단지, 환청을 그것이 너에게 초래한 결과라는 면에서 평가하라고 요청할 뿐이다. 네가 평화의 상실을 이유로 환청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마음에서 너를 위해 제거될 것이다. 네가 에고에게 보이는 모든 반응은 전쟁으로의 부름이며, 전쟁은 너에게서 평화를 앗아간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적이 없다. 평화를 확고히 지키기 위해서는 실재를 이런 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네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유일한 재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