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에고의 사고체계로 이성을 들여오는 것이 그것을 무효화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성과 에고는 상충하며, 너의 의식 안에서 공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성의 목표는 분명히 드러내서 명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이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어유희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의미를 가진 비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비전은 문자 그대로 감각 기능이다. 비전은 몸의 시각이 아니며, 따라서 너는 비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비전은 분명하며, 명백한 것은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비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성과 에고가 분리되어 각자 다른 길을 간다.
30 에고는 네가 이 수업을 배울 수 없다고 믿으며, 바로 이 믿음에 에고의 존속 전체가 달려있다. 네가 만약 이 믿음을 공유한다면, 이성은 너의 잘못을 보고 그것이 교정될 길을 열어줄 수 없을 것이다. 이성은 잘못을 꿰뚫어 보면서, 네가 실제라고 생각한 것은 실제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이성은 죄와 실수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성은 교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네가 교정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교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분명 잘못이었다고 말해준다. 에고는 교정을 반대하기에, 죄는 확고히 믿고 잘못은 무시한다. 에고는 교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에고는 저주하고 이성은 구원한다.
31 이성은 그 자체로 구원은 아니지만 평화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또한 너에게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 마음 상태를 가져다준다. 죄는 열쇠도 없이 잠긴 육중한 문처럼 평화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장벽이다. 그 장벽을 이성의 도움 없이 바라보는 자는 통과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몸의 눈에 그것은 너무도 두껍고 단단한 화강암으로 보여서, 그것을 통과하려는 시도는 미친 짓일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그것을 쉽사리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잘못이기 때문이다. 잘못이 어떤 형식을 취한다고 해서, 본래 텅 비어있는 잘못의 본성을 이성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는 없다.
32 에고는 오로지 잘못의 형식에만 매력을 느낀다. 에고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며, 거기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몸의 눈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실수, 지각의 오류, 전체의 왜곡된 파편으로서, 전체가 주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실수는 그 형식과 상관없이 교정될 수 있다. 죄란 단지 에고가 공경하는 특별한 형식을 띤 잘못에 불과하다. 에고는 모든 잘못을 보존하여 죄로 만들려고 한다. 바로 여기에 에고의 안정성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고가 만든 변화무쌍한 세상의 무거운 닻이며, 에고의 교회가 세워진 반석이다. 에고의 숭배자들은 그 위에서 몸에 묶인 채, 몸의 자유가 자신의 자유라고 믿는다.
33 이성은 너에게, 잘못의 형식은 잘못을 실수로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해줄 것이다. 만약 형식이 감추는 것이 실수라면, 그 형식은 교정을 막아낼 수 없다. 몸의 눈은 오로지 형식만 본다. 몸의 눈은 그것이 보도록 만들어진 것 너머를 볼 수 없다. 몸의 눈은 잘못을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지, 그것을 지나서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몸의 눈이 지각하는 것은 정녕 이상하다. 몸의 눈은 환상만 볼 수 있을 뿐 죄의 화강암 장벽 너머를 볼 수 없으며, 무의 바깥쪽 형식 앞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이렇게 왜곡된 형식의 비전은 모든 것의 바깥, 즉 너와 진리 사이에 서있는 벽을 전적으로 참이라고 본다. 무 앞에서 그것이 마치 단단한 벽이라도 되는 양 멈추는 시각이 어떻게 참되게 볼 수 있겠는가? 그것은 형식에 의해 저지당한다. 그것은 형식 외에는 아무것도 지각되지 않도록 보장하려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34 보지 말라고 만들어진 이러한 눈은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그 눈이 나타내는 아이디어는 자신을 만든 자를 떠나지 않았고, 그 눈을 통해 보는 자는 바로 그 눈을 만든 자기 때문이다. 보지 않는 것 외에, 과연 무엇이 그 눈을 만든 자의 목표였겠는가? 몸의 눈은 이러한 것을 위한 완벽한 수단일 뿐, 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몸의 눈이 어떻게 겉모습에 멈춰서 그 너머로 갈 수 없는지 보라. 몸의 눈이 어떻게 무 앞에 멈춰 서서, 형식 너머 의미로 갈 수 없는지 보라. 형식을 지각하는 것만큼 눈멀게 하는 것은 없다. 형식을 본다는 것은 곧 이해가 가려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5 오로지 실수만이 여러 형식을 취하며, 따라서 속일 수 있다. 형식은 참이 아니므로 바뀔 수 있으며, 바뀔 수 있으므로 실재일 수 없다. 이성은 너에게 형식이 실재가 아니라면 분명 환상일 것이며, 따라서 볼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만약 형식을 본다면, 분명 잘못 보는 것이다. 그때 너는 실제일 수 없는 것을 마치 실제인 듯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 너머를 볼 수 없는 지각은 분명 왜곡되었고, 환상을 진리로 지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36 네 형제의 실수가 취하는 형식 때문에 그와 떨어져 있지 말라. 그의 거룩함이 곧 너의 거룩함이다. 몸의 눈이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그의 거룩함의 비전이 너에게 가려지게 하지 말라. 그의 거룩한 모습은 너에게 너의 용서를 보여줄 것이다. 네 형제의 죄와 몸을 지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너의 알아차림이 차단되게 하지 말라. 너는 네 형제의 몸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 네가 그의 몸과 관련짓는 것 외에, 네가 공격하려는 그 무엇이 그에게 있겠는가? 네 형제의 잘못들 너머에, 그의 거룩함과 너의 구원이 있다. 너는 그에게 그의 거룩함을 주지는 않고, 너의 죄를 그에게서 봄으로써 너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거룩함은 정녕 너의 용서다. 그의 거룩함이 곧 너의 구원인 자를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네가 과연 구원될 수 있겠는가?
37 거룩한 관계는 아무리 갓 태어났어도 다른 무엇보다 거룩함을 가치 있게 여길 수밖에 없다. 거룩하지 않은 가치는 의식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거룩하지 않은 관계에서 각 사람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상대방의 죄를 정당화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각자는 상대방 안에서 자신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짓도록 강제하는 무언가를 본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죄를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고는, 그에게 이끌림으로써 자신의 죄를 영속화한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이 죄를 실재화하려는 열망 때문에 죄를 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성은 거룩한 관계를 그 정체대로 본다. 그것은 공동의 마음 상태로서,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잘못을 기꺼이 교정으로 보내서, 두 사람이 하나로서 행복하게 치유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