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우리는 그동안 수단과 목적의 불일치에 대해 언급했고, 너희의 거룩한 관계가 오로지 기쁨만 가져다주려면 수단과 목적을 어떻게 일치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의 목표에 부응하는 수단은 성령의 목적과 같은 근원에서 나올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 수업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이기에, 일관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거나 다른 부분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부분은 단지 수단과 목적이 여전히 일치하지 않는 영역을 나타낼 뿐이다. 이것은 굉장한 불편함을 일으키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이 수업은 너에게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수업처럼 그렇게 적게 요구하거나 더 많이 줄 수 있는 수업은 상상도 할 수 없다.
59 관계가 갑자기 죄에서 거룩함으로 변한 데 따르는 불편한 기간이 거의 끝나간다. 너는 여전히 불편함을 느끼는 바로 그 정도만큼 관계의 목적을 바꾼 성령께 수단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가 그 목표를 원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그 수단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가? 기꺼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네가 일관되지 않음을 인정하자. 목적은 수단에 의해 달성되며, 네가 어떤 목적을 원한다면 그 수단도 기꺼이 원해야 한다. 진실한 자라면 과연, "나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얻을 수단을 배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60 성령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주 조금만 요구했고, 수단을 주기 위해서도 그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수단은 목표를 따른다. 그리고 네가 주저한다면, 그것은 수단이 아닌 목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수단이 어렵다고 믿는 잘못을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단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어려울 수 있겠는가? 수단은 목표를 보장하며, 목표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수단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네가 수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목적을 원하는 마음이 이미 흔들린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할 수단도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61 네 형제를 죄 없다고 보면서 그를 몸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말로 거룩함이라는 목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가? 거룩함이란 단지, 죄의 결과가 제거되게 하여 언제나 참이었던 것을 인식한 결과기 때문이다. 죄 없는 몸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룩함은 긍정적인 반면에, 몸은 그저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몸은 죄가 있지 않지만, 죄가 없지도 않다. 몸은 본래 무며, 따라서 몸에 그리스도의 속성이나 에고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경우든 잘못일 수밖에 없다. 두 경우 모두, 그러한 속성들을 그것들이 있을 수 없는 곳에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진리라는 목적을 위해 무효화되어야 한다.
62 몸은 에고가 거룩하지 않은 관계를 실재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사용하는 수단이다. 거룩하지 않은 순간은 곧 몸의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목적은 죄다. 그 목적은 환상 속에서나 달성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형제가 몸이라는 환상은 거룩하지 않음이라는 목적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런 일관성으로 인해, 그 목적을 소중히 여기는 동안은 아무도 수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비전은 소망에 맞춰 조정된다. 왜냐하면, 시각은 항상 열망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만약 몸을 본다면, 비전이 아닌 판단을 선택한 것이다. 관계와 마찬가지로, 비전에도 정도가 없다. 너는 보거나 보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63 어떤 형제의 몸을 보는 자는 그에게 이미 판단을 덮어씌운 것이며, 따라서 그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그 형제를 죄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보지 않는 것이다. 죄의 어둠 속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둠 속에서 단지 상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너는 네 형제에 대해 지닌 환상을 그의 실재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 이곳에서, 환상과 실재는 분리되어 보관된다. 이곳에서, 환상은 결코 진리로 보내지지 않고 항상 진리로부터 감춰진다. 그리고 바로 이곳 어둠 속에서, 네 형제의 실재는 다른 몸들과 거룩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죽기 전에 한순간 죄라는 명분을 섬기는 몸이라고 상상된다.
64 이 헛된 상상과 비전 사이에는 과연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 차이는 그것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있다. 둘 다 단지 수단일 뿐이며, 각각은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에 적합하다. 어느 것도 다른 것의 목적에 기여할 수 없다. 각각의 수단은 곧 목적에 대한 선택으로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도 그것이 사용되도록 의도된 목적 없이는 무의미하며, 그 의도와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서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다. 수단이 실재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목표를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목표로 삼지 않는 한 판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65 판단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몸을 볼 수 없다. 몸을 본다는 것은 너에게 비전이 없으며, 성령이 그의 목적에 기여하라고 제공하는 수단을 거절했다는 표시다. 거룩한 관계가 어떻게 죄의 수단을 통해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판단은 네가 너 자신에게 가르친 것이지만, 비전은 네가 가르친 것을 무효화하고자 하는 성령께 배우는 것이다. 성령의 비전은 몸을 볼 수 없다. 그것은 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를 실재로 인도한다. 너의 거룩한 형제는 환상이 아니며, 그를 보는 것이 곧 너의 해방이다. 그를 어둠이 아닌 곳에서 보려고 하라. 어둠 속에서는 그에 대한 너의 상상물이 실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차단하려고 눈을 감아버렸다. 바로 이것이 너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목적에 일말의 의미라도 있다고 보는 한,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을 볼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것이다. 따라서 너는 보지 못할 것이다.
66 너는 "내가 어떻게 몸이 없는 형제를 볼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나는 정말로 그가 죄 없다고 보기를 소망하는가?"라고 물어라. 이렇게 물으면서 그의 죄 없음이 곧 네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잊지 말라. 구원은 성령의 목표고, 그 수단은 비전이다. 진정으로 보는 자가 바라보는 것은 죄 없음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는 판단할 수 없으며, 그가 보는 것은 정죄로부터 자유롭다. 그가 보는 것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봄을 가능하게 해준 비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보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