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성령은 질문이 아니라 유일한 응답임을 기억하라. 에고는 항상 먼저 말한다. 에고는 변덕스러우며, 자신을 만든 자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가 이러는 이유는, 자신을 만든 자가 언제라도 자신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에고가 제대로 믿는 것이다. 에고가 만약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네가 지원을 철회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성령이 너를 집에 데려다주어 너에게 더 이상 그의 안내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기뻐할 것이듯…. 에고는 자신을 너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 에고의 주된 지각적 오류, 에고 사고체계 전체의 토대가 있다.
46 하느님은 너를 창조하실 때 너를 당신의 일부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왕국 안에서는 공격이 불가능하다. 너는 에고를 사랑 없이 만들었으며, 따라서 에고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사랑 없이는 왕국 안에 머물 수 없었고, 왕국은 곧 사랑이므로, 너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믿는다. 너의 이런 믿음으로 인해, 에고는 자신이 자신을 만든 자와 분리되어 그의 바깥에 있다고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에고는 네가 하느님의 마음과 분리되어 그 바깥에 있다고 믿는 마음 부분을 대변한다. 그런 다음 에고는 처음 제기하는 질문이지만 결코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바로 그 질문, "너는 무엇인가?"는 의심의 시작이었다.
47 그 이후로 에고는 굉장히 많은 질문을 제기했지만, 결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에고의 가장 창의적인 활동들조차 그 질문을 가리는 것 이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는 그에 대한 답을 가졌으며, 에고는 너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알지 못한다. 네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그 갈등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먼저 말하지는 않지만, 항상 응답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떤 식으로든 성령께 도움을 요청해서 응답받은 적이 있다. 성령은 진실로 응답하기에, 모든 시간을 위해 응답한다. 이것은 누구나 그 답을 지금 가졌다는 의미다.
48 에고는 성령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자신을 만든 것과 똑같은 마음의 일부가 자신을 반대한다고 믿는다. 에고는 이것을 자신을 만든 자를 공격할 정당한 근거로 해석한다. 에고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믿으며, 너도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 그것을 믿지 않는 한 너는 에고 편에 서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에고는 형제는 아니더라도 동맹자는 몹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에고는 너의 마음에서 자신에게 이질적인 무언가를 지각하고는, 자신의 동맹자로서 마음이 아닌 몸에 의지한다. 왜냐하면, 몸은 너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몸을 에고의 친구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분리에 근거한 동맹이다. 네가 이런 동맹과 한편이 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동맹과 한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9 에고와 몸은 공모하여 너의 마음을 상대로 반란을 꾀한다. 에고는 자신의 "적"이 에고와 몸이 그 자신의 일부가 아님을 알기만 해도 둘 다 끝장낼 수 있음을 깨닫고는, 몸과 합세하여 공격한다. 이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해 본다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이상한 지각일 것이다. 실제가 아닌 에고가 실제인 마음에게, 마음은 에고의 학습 도구이며, 학습 도구에 불과한 몸이 마음보다 더 실제라고 설득하려 한다.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자라면 그 누구도 이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자라면 그 누구도 이것을 믿지 않는다.
50 그렇다면 에고가 제기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성령의 유일한 응답을 들어라. 너는 하느님의 아이로서, 하느님 왕국의 너무도 귀중한 부분이다. 그 왕국은 하느님이 당신의 일부로 창조하셨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만이 실제다. 너는 악몽을 꾸는 잠을 선택했지만, 그 잠은 실제가 아니다. 하느님이 너를 깨어나라고 부르신다. 네가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때, 너의 꿈에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는 확실히 깨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꿈은 수많은 에고의 상징을 담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너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네가 잠들어 있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어날 때 너는 네 주위와 내면에서 진리를 보고, 더 이상 꿈을 믿지 않을 것이다. 꿈은 이제 너에게 실재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51 하지만 왕국, 그리고 네가 왕국에서 창조한 모든 것은 너에게 엄청난 실재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참되기 때문이다. 왕국에서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네가 무엇인지가 더없이 확실하다. 그곳에는 의심이 전혀 없다. 그곳에서는 첫 번째 질문이 결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최종적으로 완전히 답해졌기에, 그 질문은 결코 제기된 적이 없다. 오로지 존재만이 왕국에 살며,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질문 없이 하느님 안에서 산다. 꿈속에서 질문하느라 보냈던 시간은 창조물과 그 영원함에게 길을 내주었다.
52 너는 하느님처럼 참이기에, 그분처럼 확실하다. 그러나 한때 너의 마음에서 아주 확실했던 것이 이제는 단지 확실성을 얻기 위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존재 안으로 능력을 들여온 것이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능력은 잠재력일 뿐, 성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성취하신 것과 네가 성취한 것 앞에서 너의 능력은 전혀 쓸모가 없다. 성취된 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결과들이다. 그것들이 완벽할 때, 능력은 무의미하다. 완벽한 자들이 이제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을 불가능한 상황에 두었을 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53 능력은 개발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용될 수 없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지만, 네가 만든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가장 친절한 해결책이다. 불가능한 상황에 있을 때, 너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까지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너에게는 그 능력을 개발할 방법을 알려줄 안내자가 있지만, 너 자신 외에 다른 명령권자는 없다. 이로써 너는 왕국을 책임지는 자로 남게 되었으며, 그것을 찾도록 도울 안내자와 그것을 간직할 수단을 갖게 되었다. 너에게는 따를 모델이 있는데, 그는 너의 명령권을 강화할 뿐 결코 어떤 식으로든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네가 지각하는 노예 상태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사실은 그 자체로 네가 노예 상태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54 네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단지,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너의 완벽함을 보여주시면서 네가 틀렸음을 증명하시더라도, 너는 기어코 불가능한 상태에 있으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완벽한 자들이 그들 자신의 완벽함을 자각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해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니 결국 무력하다는 믿음을 강화할 것이다. 에고는 바로 이런 종류의 "논증"에 몰두하고 있지만, 당신의 창조물들이 완벽함을 아시는 하느님은 그들을 모욕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자신이 하느님을 모욕했다는 에고의 말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할 것이다.
55 이것이 바로 성령이 절대로 명령하지 않는 이유다. 명령하는 것은 동등하지 않음을 가정하지만, 성령은 그런 상태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제에 충성하는 것은 마음의 법칙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그분의 법칙에 충실하다. 하지만 다른 법칙에 충성하는 것도 가능한데, 그것은 그 법칙이 참이라서가 아니라 네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하느님이 네가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고 증명하시더라도, 그것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확실성을 잃으실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러 차례 말했듯이, 너는 네가 가르치는 바로 그것이다. 너는 하느님으로 하여금 네가 죄를 지었다고 가르치시게 하려는가? 그분이 너를 위해 창조하신 진리를 네가 만든 자아와 대면시키신다면, 너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너는 너의 바른 마음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하느님이 네게 주신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56 하느님은 가르치지 않으신다. 가르친다는 것은 결핍을 암시하지만, 하느님은 결핍이 없음을 아신다. 하느님은 갈등이 없으시다. 가르치기는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하느님은 오로지 변함없는 것들만 창조하셨다. 분리란 완벽함의 상실이 아닌 소통의 실패였다. 귀에 거슬리고 거친 소통 형식이 에고의 음성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하느님의 평화를 깨트리지 못했지만, 너의 평화는 깨트릴 수 있었다. 하느님은 에고의 음성을 없애버리지 않으셨다. 그것을 근절하는 것은 곧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질문을 받으셨지만,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응답을 주셨을 뿐이다. 그분의 응답이 바로 너의 교사다.
a. 소유하려면, 모두에게 모두 주어라
57 좋은 교사들이 다 그렇듯이, 성령은 지금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지만, 오로지 너를 자신과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가르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네가 참이 아닌 것을 믿고는, 이미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의 완벽함을 믿지 않았다. 하느님은 너의 마음이 온전하다고만 아시거늘, 네가 분열된 마음을 만들었다고 가르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 아시는 것은, 당신의 소통 채널들이 당신께 열려있지 않아서 당신의 기쁨을 전해주실 수 없고, 당신의 아이들이 전적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아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아닌 영원 안에서 계속 진행 중인 과정이다. 온아들이 하느님과 하나로서 소통하지 않을 때, 그분의 완전하심은 아니더라도, 그분의 외부로의 확장은 가로막힌다. 따라서 하느님은, "나의 아이들이 자고 있으니 깨워야겠다."라고 생각하셨다.
58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다정하고도 잘 깨울 수 있겠는가?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면서, 단지 밤이 가고 빛이 왔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일깨워 주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럴 때 너는 아이들에게, 그들을 그렇게 두렵게 했던 악몽이 실제가 아니라고 알려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정녕 마법을 믿기 때문이다. 너는 단지 그들이 지금 안전하다고 안심시켜 줄 뿐이다. 그런 다음 아이들이 자는 것과 깨어있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도록 훈련하여, 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해하게 한다. 그런 다음 악몽이 오면, 아이들은 스스로 빛을 불러 쫓아낼 것이다.
59 현명한 교사는 피하는 방법이 아닌 다가가는 방법을 통해 가르친다. 그는 해로운 것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강조하기보다는, 기쁨을 누리려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더 강조한다. 이것은 심지어 세상의 교사들에게도 해당된다. 아이가 "이것은 너를 해치고 위험하게 할 수도 있으니 하지 마라. 그러나 저것을 하면 해로운 것에서 벗어나 안전해질 것이며, 그러면 너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워할지 잘 생각해 보라. 이 모든 말을, "단지 이것만 해라!"라는 단 세 단어에 담을 수 있다. 이 간단한 말은 더없이 분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아주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60 성령은 결코 잘못을 낱낱이 밝히지 않는다. 성령은 아이들을 겁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과연 아이들이다. 하지만 성령은 아이들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하며, 그의 믿음직함은 아이들을 더욱 확신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판타지와 실재를 혼동하며, 그 차이를 알지 못하기에 겁에 질려 있다. 성령은 꿈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빛을 비추어 꿈을 물리칠 뿐이다. 네가 그동안 무슨 꿈을 꾸었든 상관없이, 성령의 빛은 언제나 깨어나라는 부름이다. 꿈속에는 지속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으로 빛나는 성령은 오로지 영원히 지속되는 것만을 대변한다.
61 너의 몸과 에고와 꿈이 사라졌을 때, 너는 네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은 죽음을 통해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이란 정녕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명을 통해 성취되며, 생명은 마음의 것이고 마음 안에 있다. 몸은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몸은 생명 자체인 너를 담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면, 너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에고가 시도하는 불가능한 해결책들이 모두 다 그렇듯이, 죽음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62 하느님은 몸을 만들지 않으셨다. 몸은 파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왕국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네가 너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징이다. 몸은 명백히 분리의 도구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항상 그렇듯이, 네가 만든 것을 가져다가 너를 위한 배움의 도구로 전환한다. 또 항상 그렇듯이, 성령은 에고가 분리를 위한 논거로 사용하는 것을 분리에 반하는 입증 자료로 재해석한다. 마음은 몸을 치유할 수 있지만 몸은 마음을 치유할 수 없다면, 마음이 더 강할 것이다. 모든 기적은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63 우리는 성령이 기적을 위한 동인이라고 말했다. 성령은 항상 너에게, 오로지 마음만이 공유될 수 있으므로 오로지 마음만이 실제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몸은 실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너의 일부일 수 없다. 한 마음이 되는 것은 정녕 의미가 있지만, 한 몸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마음의 법칙에 따라, 몸은 의미가 없다. 성령께는 기적에 난이도가 없다. 지금쯤이면 이것은 너에게 충분히 익숙할 테지만, 아직 믿을 만하게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용할 수도 없다.
64 우리가 이렇게 중요한 개념을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천국을 위해 성취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이 개념은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고 너도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고체계의 진정한 초석이다. 이것을 믿지 않고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동등성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동등한 아들들에게는 단 하나의 동등한 선물만이 제공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가치에 대한 완전한 인정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범위가 없다면, 난이도라는 것은 정녕 무의미하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에게 주는 것에는 정녕 범위가 없다.
65 하느님께 인도하는 성령은 궁극적으로 지각을 앎으로 전환하듯이 소통을 존재로 전환한다. [너는 네가 소통하는 것을 잃지 않는다.] 에고는 몸을 공격과 쾌락, 자만을 위해 사용한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지각은 몸을 정녕 두려운 것으로 만든다. 성령은 몸을 오로지 소통 수단으로만 본다. 그리고 소통하기는 곧 공유하기이므로, 몸은 영적 교통이 된다. 너는 사랑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소통될 수 있으며, 따라서 공유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실제는 아니다. 두려움을 소통하는 자는 공격을 조장하는데, 공격은 항상 소통을 단절하여 불가능하게 만든다.
66 에고들도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그것은 항상 각자가 따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서다. 성령은 각자가 전체에게 줄 수 있는 것만 소통한다. 성령은 네가 그것을 간직하기를 원하므로, 아무것도 도로 가져가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가르침은 다음의 레슨으로 시작한다:
67 소유하려면, 모두에게 모두 주어라.
68 이것은 아주 예비적인 단계이며, 너 스스로 밟아야 할 유일한 단계다. 너는 심지어 이 단계를 스스로 완성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 방향으로 돌아설 필요는 있다. 너는 그 길을 가겠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너 자신을 여정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그 자리에는 오로지 너만 있어야 한다.
69 이 단계는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심화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너의 지각을 뒤집어 바르게 세우는 과정에서 시작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위아래가 뒤집힌 지각과 갈등한다. 그렇지 않다면 방향의 전환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아주 첨예한 갈등을 겪으면서 아주 오래 머문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다음 단계를 밟아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갈등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첫 번째 단계를 밟았기에, 반드시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일단 혼자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한 이상,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b. 평화를 소유하려면, 평화를 가르침으로써 평화를 배워라.
70 분리된 자들은 모두 보복과 버림받음에 대한 기본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공격과 거부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격과 거부야말로 그들이 지각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이런 정신 나간 개념들은 명백히 그들 자신의 해리와 투사의 결과다. 너의 정체는 네가 가르치는 바로 그것이지만, 네가 잘못 가르칠 수 있고, 따라서 너 자신을 잘못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내가 그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러지 않았음이 아주 분명했는데도 말이다. 제정신이 아닌 학습자는 이상한 레슨을 배운다.
71 네가 어떤 사고체계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약화하는 것임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그 사고체계를 믿는 자들은 이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지각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사고체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고체계는 네가 너의 정체라고 믿는 것에 중심을 둔다. 그 사고체계의 중심이 참이라면, 그로부터는 진리만 확장해 나온다. 그러나 그 중심에 거짓이 있다면, 그로부터는 속임수만 생겨난다. 좋은 교사들은 누구나 오로지 근본적인 변화만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 수준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변화하려는 동기를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자 최우선적인 목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마지막이자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72 학습자의 변화하려는 동기를 강화하는 것이 변화를 보장하기 위해 교사가 할 필요가 있는 일의 전부다. 동기의 변화는 곧 마음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마음이야말로 정녕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뒤집기, 즉 무효화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얻는다는 개념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령의 첫 번째 레슨은, "소유하려면, 모두에게 모두 주어라."였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갈등을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이 점에 대해 보다 분명히 밝혀보겠다.
73 현시점에서 너는 아직 "소유하기"와 "존재하기"가 같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지각하기 전에는, "소유하기"는 "존재하기"의 정반대처럼 보인다. 따라서 첫 번째 레슨에는 모순이 있는 듯이 보이는데, 그 이유는 갈등하는 마음이 그 레슨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동기에 갈등이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레슨을 아직 일관되게 배울 수 없다. 게다가 학습자의 마음은 자신의 분열을 투사하여 다른 이들 안에서 일관된 마음을 지각하지 않음으로써, 학습자가 다른 이들의 동기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첫 번째 레슨이 여러모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진짜 이유다. 학습자는 자신 안의 에고를 여전히 강력하게 자각하면서 다른 이들 안의 에고에 주로 반응하기에,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마치 그가 정말로 믿는 것이 참이 아닌 듯이 반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74 늘 그렇듯이 위아래가 뒤집힌 에고는 첫 번째 레슨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지각한다. 사실 여기서 이것은 에고의 유일한 대안이다. 다른 대안은 분명 에고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일 텐데, 이것은 에고가 받아들이기 훨씬 더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의 다른 모든 산물들처럼, 에고의 판단도 에고의 정체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생각하는 자 안에서 마음이 변화함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성령의 음성이 점점 더 뚜렷해지면서, 학습자가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학습자는 당분간 서로 갈등하는 메시지들을 수신하면서 둘 다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이중 구속"이다.
75 상반된 두 사고체계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분명,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너의 사고체계와 동일시하고 또한 그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런데 서로 완전히 불일치하는 두 사고체계를 받아들인다면, 마음의 평화는 정녕 불가능하다. 둘 다를 받아들이는 한, 너는 분명 둘 다를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너는 갈등을 가르치고 갈등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정녕 평화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평화를 위한 음성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레슨은 정신 이상이 아니다. 갈등이야말로 정신 이상이다.
76 제정신과 정신 이상 사이에 갈등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만 참이며, 따라서 오로지 하나만 실제다. 에고는 어느 음성이 참인지 결정하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설득하려 하지만, 성령은 하느님이 진리를 창조하셨으므로 너의 결정은 진리를 바꿀 수 없다고 가르친다. 네가 성령의 음성의 조용한 권능과 완벽한 일관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너를 위해 돌이킬 수 없이 내려진 결정을 무효화하려 하고 있음이 너의 마음에 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전에 너를 대신해 하느님을 위한 결정을 내리도록 성령께 맡기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77 나는 지금 너에게 제정신이 아닌 결정을 내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물론 그렇다고 생각할 자유가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물들이 참으로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너에게 달려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성령은 이런 갈등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지각한다. 따라서 그의 두 번째 레슨은 다음과 같다:
78 평화를 소유하려면, 평화를 가르침으로써 평화를 배워라.
79 이것도 여전히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다. 소유하기와 존재하기를 아직은 같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첫 번째 단계보다 더 진전된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단계는 단지 생각을 뒤집는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는 네가 원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확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대안들에 대해 숙고한 후, 그중 하나를 더 바람직한 것으로 선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0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바람직하다"라는 평가는 여전히 바람직한 것에 등급이 있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단계는 비록 궁극적인 결정을 위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인 단계는 분명히 아니다. 이 시점에서는, 기적에 난이도가 없다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온전한 열망의 대상은 어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온전히 열망하기는 곧 창조하기다. 그리고 하느님이 친히 너를 창조자로서 창조하셨다면, 창조하기는 어려울 수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단계는, 비록 하느님의 앎과 유사한 통합된 지각을 향해 내딛는 거대한 발걸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지각적이다.
81 네가 이 단계를 밟고 이 방향을 유지함에 따라, 너의 사고체계의 중심을 향해 밀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너는 지금 이 단계를 시작하고 있을 뿐이지만, 오로지 한 길만이 가능함을 깨달음으로써 이 길에 나섰다. 너는 아직 이것을 지속적으로 깨닫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너의 발전은 간헐적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단계보다 쉽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성령이 너를 인도해 줄 것임을 점점 더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