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평화가 흘러 넘어가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바로, 평화를 제거하려는 너희의 욕구다. 너희가 평화를 지니고 있지 않는 한, 평화는 확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평화가 밖으로 퍼져나가 다른 이들을 불러들이는 중심이다. 너희는 평화의 집이자 평화가 머무는 조용한 거처로서, 평화는 그로부터 부드럽게 밖으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너희를 떠나지는 않는다. 너희가 평화를 집 없는 신세로 만들려고 한다면, 평화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 안에 머물러 살 수 있겠는가? 평화가 창조물 전체로 퍼져나가려면, 평화는 먼저 너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어서 평화를 요청하는 모든 이에게 도달하여, 그들을 너희와 결합함으로써 안식을 안겨주어야 한다.
41 너희는 왜 평화를 집 없는 신세로 만들기를 원하고자 하는가? 평화가 너희와 살기 위해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희가 그렇게도 치르고 싶어 하지 않는 대가가 무엇인 것 같은가? 너희 사이에 여전히 작은 모래 장벽이 서있다. 너희는 지금 그 장벽을 강화하고자 하는가? 너희는 그 장벽을 너희 자신만을 위해 치우라고 요청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자신을 위해 그 장벽을 치워달라고 요청한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모든 이에게 안겨주고자 하지만, 너희를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작은 모래 둑과 먼지로 된 벽, 나지막한 장벽처럼 보이는 것으로 네 형제들의 구원을 가로막고자 하는가? 하지만 너희가 서로에게 품은 이렇게도 사소한 공격의 잔재야말로 너희 안의 평화가 흘러 나갈 때 만나는 첫 번째 장애물이다. 이렇게 작은 증오의 벽은 여전히 하느님의 뜻을 반대하고, 그것을 제한하려 한다.
42 성령의 목적은 너희 안에서 평화로이 안식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도 그 목적이 너희와 온전히 결합하도록 허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희는 아직도 아주 약간 하느님의 뜻을 반대한다. 그리고 그 약간이야말로 너희가 전체에 부과하려는 제한이다. 하느님의 뜻은 여럿이 아니고 하나다. 하느님의 뜻에는 대적對敵이 없다. 하느님의 뜻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여전히 작은 장벽 뒤에 가둬놓고 서로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우주보다 더 강력해 보인다. 그것은 우주와 그 창조주를 방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벽이 천국의 목적을 감춰서, 그것을 천국과 떼어놓으려고 한다.
43 너희는 너희에게 구원을 주는 자로부터 구원을 밀쳐내려는가? 왜냐하면, 너희가 바로 그러한 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평화는 하느님을 떠날 수 없듯이 너희도 떠날 수 없다. 이 작은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가둬둘 수 없다. 평화는 반드시 그 위를 흘러 넘어, 아무런 방해 없이 너희와 결합할 것이다. 구원은 너희에게 유보될 수 없다. 구원은 너희의 목적이다. 너희는 이것과 무관하게 뜻할 수 없다. 너희에게는 서로와 무관한 목적도 없고, 성령께 공유를 청한 목적과 무관한 어떤 목적도 없다. 그 작은 벽은 평화의 날개 아래에서 너무도 조용히 무너져 버릴 것이다! 평화는 너희로부터 온 세상으로 자신의 메신저들을 파견할 것이며, 그들이 오는 앞에서 장벽들은 쉽사리 무너져 내릴 것이다. 너희가 너희 사이에 세우려는 장벽들이 쉽사리 극복될 것이듯 말이다.
44 세상을 이기는 것은 너희의 작은 벽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다. 이 장벽이 없다면, 너희 관계의 기적 안에 모든 기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기적들 사이에는 난이도가 없다. 기적들은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각각의 기적은 죄의식의 매력으로부터 사랑의 매력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것이다. 기적이 어디서 행해지든,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은 기적을 가로막는 진짜 장벽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너희 사이에 서있는 듯한 모든 장벽은 너희가 응답한 사랑의 매력으로 인해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 너희에게 응답한 성령이, 사랑의 매력에 응답한 너희로부터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집은 너희의 거룩한 관계 안에 있다. 성령과 그의 거룩한 목적 사이에 서서 방해하려고 하지 말라. 성령의 목적은 곧 너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성령으로 하여금 너희 관계의 기적을, 그 관계에 포함된 모든 이에게 그것이 주어진 대로 조용히 확장하게 하라.
45 천국에 숨죽인 고요함과 행복한 기대, 여정의 끝을 인정하는 기쁨으로 잠시 멈추는 순간이 있다. 너희가 천국을 알듯이, 천국도 너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 사이에는 그 어떤 환상도 서있지 않다. 작은 그림자 벽을 바라보지 말라. 태양이 그 위로 떠올랐다. 그림자 하나가 너희를 어떻게 태양과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 그림자들은 또한 너희를 환상들이 끝나는 빛과 떼어놓을 수도 없다. 기적 하나마다 환상 하나가 끝난다. 이러한 것이 여정이었고, 이러한 것이 여정의 끝이었다. 그리고 너희가 받아들인 진리라는 목표 안에서, 모든 환상이 끝날 수밖에 없다.
46 너희가 초대해 들인 성령을 제거하고 몰아내려는 사소하고 정신 나간 소망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너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뿌리 뽑혀 목표 없이 떠다니는 이 사소한 소망은 아무 데나 내려앉아 잠시 머물 수 있다. 이제 그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너희와 살려고 들어오기 전에는, 그 소망은 죄와 죄의 결과에 확고하고도 변함없이 헌신한다는 강력한 목적을 가진 듯했다. 이제 그 소망은 목표를 잃고, 의미 없이 떠돌면서 사랑의 매력에 사소한 지장만 일으킬 뿐이다.
47 이 깃털 같은 소망, 이 사소한 환상, 죄에 대한 믿음의 이 미미한 잔재가 한때 세상처럼 보였던 것 중에 남아있는 전부다. 그것은 더 이상 평화를 무자비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다. 그것은 정처 없이 떠돌기에, 그 결과가 전보다 더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단단히 짜인 망상체계보다 더 불안정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체계의 외견상 안정성은 곧 그것에 속속들이 스며든 약함이다. 그리고 그 약함은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그 사소한 잔재가 일으키는 변화무쌍함은 단지 그것의 결과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48 진리의 위대한 날개 앞에서 작은 깃털 하나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독수리의 비상을 가로막고 여름의 도래를 방해하겠는가? 그것이 눈 덮인 정원에 내리쬐는 태양의 효과를 저해할 수 있겠는가? 이 작은 쪼가리가 얼마나 쉽게 들려 가버리고 결코 돌아오지 않는지 보면서, 애석함이 아닌 기쁨으로 그것과 작별하라.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더 큰 확신을 가졌을 때조차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았다. 사라지는 눈송이들에 눈길을 고정한 채 겨울의 추위를 기억하면서 떨고 있느니, 차라리 여름날의 태양을 맞이하지 않으려는가?
죄의식의 매력
49 죄의식의 매력은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사랑은 결코 죄의식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진리만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사랑은 진리에서 자기 자신을 보며, 진리와 더불어 거룩한 연합과 완성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넘겨보듯, 두려움은 사랑을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두려움이 죄의식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사랑에는 죄의식의 종말이 들어있다. [사랑은 오로지 사랑에만 매력을 느낀다.] 사랑은 죄의식을 완전히 간과하기에, 두려움을 전혀 보지 않는다. 사랑은 공격이 전혀 없기에, 두려워할 수 없다. 두려움은 사랑이 보지 않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각자는 상대방이 보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헌신을 가지고, 두려움은 죄의식을 바라본다. 각각은 자신의 메신저를 파견하며, 그 메신저들은 자신이 파송된 언어로 쓰인 메시지를 갖고 돌아온다.
50 사랑의 메신저들은 온유하게 파견되어, 사랑과 온유함의 메시지를 갖고 돌아온다. 두려움의 메신저들은 죄의식을 색출하고, 찾아낼 수 있는 온갖 악과 죄의 부스러기를 소중히 다루고, 그중 한 조각이라도 잃어버리면 죽을 각오로 자신의 군주 앞에 공손히 바치라는 가혹한 명령을 받는다. 지각은 제각기 다른 것의 메시지를 가져오라고 다른 언어로 요구하는 두 주인을 따를 수 없다. 두려움이 먹고 살려는 것을, 사랑은 간과한다. 두려움이 요구하는 것을, 사랑은 볼 수조차 없다.
51 사랑의 온유한 지각은 두려움이 죄의식에 느끼는 격렬한 매력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사랑이 바라보려는 것은 두려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이 세상의 관계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어떤 감정에게 그것의 메신저를 파견하여 세상을 보게 하고, 본 것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요청했는지에 달려있다. 두려움의 메신저들은 공포를 통해 훈련받고, 주인이 부르면서 섬기라고 명하면 부들부들 떤다. 두려움은 자신의 친구들조차 무자비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메신저들은 죄의식을 게걸스럽게 찾아내서 죄지은 듯이 몰래 사라진다. 그들이 되가져 온 것만 실컷 먹게 하는 주인은 그들을 춥고 굶주리게 하여 아주 악랄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아주 작은 조각도 그들의 굶주린 눈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죄를 잔인하게 수색하면서 살아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눈에 띄는 대로 덮치고, 비명을 지르면서 그것을 주인에게 끌고 가서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게 한다.
52 이 잔인한 메신저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여 세상을 포식하고 실재를 약탈하게 하지 말라. 그들은 너에게 뼈와 가죽과 살에 대한 소식을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패하는 것을 찾아서 썩고 상한 것으로 배를 그득 채워서 돌아오라고 배웠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아름답다. 그러한 것들은 굶주림의 잔인한 고통을 덜어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의 고통으로 미쳐버려서, 그들을 파견하는 자에게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침으로써 처벌을 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53 성령은 너에게, 네가 두려움을 통해 훈련한 메신저들 대신에 파견할 사랑의 메신저들을 주었다. 두려움의 메신저들처럼 사랑의 메신저들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너에게 몹시도 돌려주고 싶어 한다. 네가 그들을 파견하면, 그들은 오로지 흠 없는 것과 아름다운 것, 온유한 것과 친절한 것만을 볼 것이다. 그들은 또한 아주 사소한 자비로운 행동, 아주 작디작은 용서의 표현, 아주 약한 사랑의 숨결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그 모든 행복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와서 너와 사랑스럽게 공유할 것이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너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안전의 메시지다. 그들은 세상이 친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54 네가 오로지 성령이 주는 메신저들만 파견하고 그들의 메시지만 원한다면, 더 이상 두려움을 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죄의식이 전부 씻기고 아름다움으로 부드럽게 빗질되어 네 눈앞에서 변형될 것이다. 네가 세상에 놓아두지 않은 두려움 외에, 세상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네가 사랑의 메신저들에게 세상에서 어떤 두려움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더라도, 너는 더 이상 그 두려움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은 자신의 메신저들을 너희에게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을 서로에게 파견하여 사랑이 보는 것을 가지고 각자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 메신저들은 너희가 대신 파견한 두려움의 굶주린 개들을 대체하라고 주어졌다. 그들은 두려움의 종식을 알리려고 나아간다.
55 부드럽고 기쁜 속삭임과 노랫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정원에 얼룩 한 점 없는 천으로 덮은 테이블이 있고, 사랑 또한 그 위에 만찬을 베풀어 너희를 배불리 먹이려 한다. 이것은 너희의 거룩한 관계를 영예롭게 하고, 모든 이를 영예로운 손님으로 반가이 맞아들이는 만찬이다. 그리고 거룩한 순간에, 모든 이가 함께 영적 교통의 테이블 앞에서 온유하게 결합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에 약속했고 지금도 여전히 약속하듯, 그곳에서 너희와 결합할 것이다. 너희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내가 반가이 맞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반가이 맞아들여지는 바로 그곳에, 내가 있다.
56 나는 은혜의 상태에서 반가이 맞아들여지며, 이것은 너희가 마침내 나를 용서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 죄의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너희 대신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에고에게 죄는 죽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속죄는 살인을 통해 성취된다. 그리고 구원은 하느님의 아들이 너 대신 살해당한 방식이라고 간주된다.
57 하지만 몸의 하찮음을 아는 내가 사랑하는 너에게 나의 몸을 바치려 하겠는가? 아니면, 몸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가르치려 하겠는가? 나의 몸은 너의 몸보다 더 가치 있지 않았다. 그것은 구원을 전하는 더 나은 수단도 아니었고, 구원의 근원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다른 이를 위해 죽을 수 없으며, 죽음은 죄를 속죄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죄가 실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살 수 있다. 몸이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 한, 몸은 정녕 죄의 상징처럼 보인다. 몸이 너에게 쾌락을 줄 수 있다고 믿는 한, 너는 또한 몸이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도 믿을 것이다.
58 그렇게 왜소한 것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너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누릴 행복을 제한하는 것은 곧 고통에게 너의 빈약한 창고를 채워서 너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녕 에고가 보는 완성이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행복이 제거된 곳에 몰래 기어들어 와서, 행복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영적 교통은 몸을 넘어서 가며, 따라서 죄를 넘어서 가는 다른 종류의 완성이다.
b. 두 번째 장애물: 몸이 제공하는 것 때문에 몸이 가치 있다는 믿음
59 우리는 전에, 평화를 제거하려는 너의 욕구야말로 평화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죄의식의 매력이 전권을 휘두르는 곳에서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첫 번째 장애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평화가 흘러 넘어가야 하는 두 번째 장애물은, 몸이 제공하는 것 때문에 몸이 가치 있다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죄의식의 매력이 몸에 드러나게 되어, 몸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60 너는 바로 이 가치를 평화가 너에게서 강탈해 가려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바로 이것을 평화가 빼앗아 가서 너를 집 없는 신세로 만들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위해, 너는 평화에게 집을 제공하기를 거부하려 한다. 너는 바로 이 "희생"이야말로 네가 치르기에는 너무 크고, 너에게 요구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라고 느낀다.
61 그것이 과연 희생인가 해방인가? 몸 안에 구원이 놓여있다는 너의 이상한 믿음을 정당화하는 그 무엇을 몸이 실제로 너에게 주었는가? 이것이 죽음에 대한 믿음임을 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지각은 속죄를 살인으로 보는 데 집중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은 곧 두려움이라는 아이디어의 근원이다. 성령의 메신저들은 몸 너머로 멀리 파견되어, 마음에게 거룩한 영적 교통에 동참하여 평화로워지라고 청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위해 그들에게 준 메시지다.
62 오로지 두려움의 메신저들만이 몸을 본다. 그들은 고통받을 수 있는 것을 찾기 때문이다. 고통받을 수 있는 것을 떠나는 것이 희생인가? 성령은 너에게 몸의 쾌락에 대한 희망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몸에는 쾌락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다. 하지만 몸은 또한 너에게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줄 수 없다. 고통은 성령이 요구하는 유일한 "희생"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성령은 제거하고자 한다.
63 평화는 너로부터 출발하여 오로지 영원한 것만을 향해 확장한다. 그리고 평화는 네 안에 있는 영원한 것으로부터 바깥을 향해 뻗어나간다. 평화는 다른 모든 것을 넘어 흘러간다. 첫 번째 장애물처럼 두 번째 장애물도 단단하지 않다. 너는 평화를 제거하거나 제한하려고 뜻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평화와 평화의 전진 사이에 세우려는 이런 장애물들은 단지, 너의 뜻과 그것의 성취 사이에 세우는 장벽이 아니겠는가? 너는 두려움의 만찬이 아닌 영적 교통을 원한다. 너는 죄의식의 고통이 아닌 구원을 원한다. 너는 작은 진흙더미가 아닌 아버지가 너의 집이 되시기를 원한다. 너희의 거룩한 관계 안에, 아버지의 아들이 있다. 그는 아버지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영적 교통을 잃지 않았다. 너희가 서로 결합하기로 동의했을 때, 너희는 이것이 그러함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에서 해방한다.
64 너는 너의 환상을 위해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그렇게 얻은 것 중에 그 무엇도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천국은 희생될 수 없으며, 너에게는 희생이 요구될 수 없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은가? 너는 우리의 거룩한 연합 앞에 어떤 장애물도 설치할 수 없다. 너희의 거룩한 관계 안에, 내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것이다. 우리는 문밖이 아니라 문안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 문이 안으로부터 얼마나 쉽게 열려, 평화가 흘러 넘어가 지친 세상을 축복하게 하는지! 너희가 이미 한계 없는 것과 결합했거늘, 우리가 함께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는가? 죄의 종말이 너희의 손안에 있으며, 너희는 그것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서로에게서 죄를 찾으려고 멈추려는가?
65 나를 죄의 종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삼고, 나를 보듯이 서로를 바라보라. 너희가 하느님의 아들이 지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죄에 대해 나를 용서하라. 너희 용서의 빛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기억하고,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잊을 것이다. 내가 너희의 용서를 청하는 이유는, 너희가 유죄라면 나도 유죄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극복하고 세상을 이겼다면, 그때 너희도 나와 함께 있었다. 너희는 내 안에서 죄의 상징을 보려는가 아니면 죄의 종말의 상징을 보려는가? 내가 너희에게 의미하는 것을 너희 자신 안에서 본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
66 너희의 거룩한 관계로부터, 진리는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너희가 아버지와 나에게 제공한 집의 깊은 곳에서 구원이 흘러나온다. 아버지와 아들이 결합한 조용한 영적 교통 안에서, 우리는 함께 있다. 오! 신실한 자들이여, 너희 내면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연합으로 오라! 너희가 평화에게 천국 안의 집을 준 것에 대한 감사로 너희에게 제공되는 것을 물리치지 말라. 죄의 종말이라는 기쁜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라. 그러면 온 세상이 응답할 것이다. 모든 이가 너희에게 죄의 종말에 대해 증언하고 죄의 힘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보여줄 때, 너희가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해 보라. 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죄의식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죽음의 강력한 변호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죽음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67 너희의 환상에 대해 나를 용서하고,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처벌에서 나를 놓아주어라. 그렇게 너희는 서로에게 자유를 가르침으로써 내가 가르친 자유를 배울 것이며, 또한 그렇게 나를 놓아줄 것이다. 나는 너희의 거룩한 관계 안에 있지만, 너희는 자유에 맞서 세운 장애물 뒤에 나를 가둬서 내가 너희에게 가는 길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이미 거기에 있는 성령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는 영적 교통은 너희 안에 있는 온 세상에 빛을 가져다줄 새로운 지각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쾌락과 고통
68 너의 작은 역할은 단지 희생이라는 아이디어 전체를 성령께 드리고, 그 대신에 성령이 준 평화를, 평화의 확장을 저지하여 평화에 대한 너의 자각을 제한하려는 한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성령이 주는 것의 무한한 권능을 갖고서 그것을 하느님 아들의 해방을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평화가 아니며, 너는 그러한 평화를 가졌기에 그것을 제한할 수 없다. 만약 평화가 집 없는 신세라면, 너도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의 집이신 하느님도 우리와 더불어 집 없는 신세가 되신다. 이것이 과연 너의 뜻인가? 너는 평화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자 하는가? 평화와 행복에 대한 희망을, 너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에 걸고자 하는가?
69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정당한 근거가 있다. 영원한 것은 영원히 친절하고, 무한히 인내하며,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평화를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네 안에서 이미 평화로운 것, 자기 자신처럼 불멸인 것과만 연합할 수 있다. 몸은 너에게 평화도 혼란도, 고통도 기쁨도 가져다줄 수 없다. 몸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오로지 주어진 목적만 있다. 몸은 네가 몸에 부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일 것이다. [오로지 마음만이 목적을 세울 수 있으며, 오로지 마음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보고 그것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 평화와 죄의식은 모두 마음이 이루어내는 상태들이다. 그리고 각 상태는 그 상태를 불러일으킨, 따라서 그 상태와 어울리는 감정의 집이다. 다만 어떤 상태가 너와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 보라.
70 여기에 너의 선택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녕 자유롭다. 하지만 그 선택 안에 놓여있는 모든 것도 같이 올 것이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너의 정체는 결코 그 선택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몸은 믿음의 대단한 배신자로 보인다. 몸 안에는 환멸과 믿음 없음의 씨앗이 놓여있지만, 오로지 네가 몸에게 몸이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할 경우에만 그러하다. 너의 실수가 과연 우울과 환멸, 그리고 너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보복 공격의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너의 잘못을 너의 믿음 없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말라. 너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너의 실수를 교정하는 것은 너에게 믿음을 위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71 몸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면서 고통을 발견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에고가 죄의 증거라고 보는 관계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전혀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너 자신을 몸과 동일시한 것의 불가피한 결과다. 몸과의 동일시는 고통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그것은 두려움에게 들어와서 너의 목적이 되라고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매력이 반드시 두려움과 함께 들어올 것이며, 따라서 두려움이 몸에게 행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몸은 모든 환상의 고통을 공유할 것이며, 쾌락의 환상은 고통과 같을 것이다.
72 이것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두려움의 명령 아래, 몸은 죄의식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주인을 섬길 것이다. 그 주인이 죄의식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몸이 존재한다는 환상 전체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통의 매력이다. 이런 지각의 지배를 받아, 몸은 고통의 하인이 되어 충실하게 고통을 구하고 고통이 쾌락이라는 아이디어에 복종한다. 몸에 대한 에고의 엄청난 투자 아래에는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깔려있다. 에고는 이런 정신 이상 관계를 감추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 관계를 먹고 산다. 에고는 너에게 몸의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건 죽음이야."라고 속삭인다.
73 도대체 왜 몸이 너에게 무엇이든 되어야 한단 말인가? 확실히 몸을 구성하는 것들은 값지지 않다. 마찬가지로 확실히 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몸은 네가 원하는 감정을 너에게 전달한다. 다른 모든 소통 매체처럼, 몸은 주어진 메시지를 받아서 내보낸다. 몸은 그 메시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 그 메시지에 부여된 모든 감정은 보내는 자와 받는 자가 주는 것이다. 에고와 성령은 둘 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여기서 메시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가 같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성령은 이것을 너에게 기쁘게 알려준다. 에고는 네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원하기에, 그것을 숨긴다. 증오와 공격의 메시지를 단지 자기 자신에게 보낼 뿐임을 이해한다면, 그 누가 그런 메시지를 보내려 하겠는가? 그 누가 자기 자신을 고발하여 유죄로 만들고 정죄하려 하겠는가?
74 에고의 메시지는 항상, 너의 공격과 죄의 메시지로 인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너로부터 바깥으로 보내진다. 설령 네가 고통받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더 고통받을 것이다. 대단한 사기꾼은 이것이 그렇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평화의 "적"인 그는 너의 모든 증오의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너 자신을 해방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에고는 몸에게 다른 몸을 공격하는 데서 고통을 찾을 것을 명하며, 고통을 쾌락이라고 부르면서 너에게 그것을 공격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제공한다.
75 에고의 광기에 귀 기울이지 말고, 불가능한 것이 참이라고 믿지도 말라. 에고는 몸을 죄라는 목표에 바쳤으며, 몸이 그것을 이뤄줄 수 있다고 철저히 믿고 있음을 잊지 말라. 에고의 슬픈 제자들은 에고의 지배를 엄숙히 축하하면서 몸의 찬가를 끝없이 불러댄다. 그들 가운데 죄의식의 매력에 굴복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 가운데 몸이 자기 자신이며, 몸이 없으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 자도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몸 안에서도 그들의 죽음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
76 에고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죽음에 바쳤음을 깨닫지 못한다. 자유가 그들에게 제공되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공된 것은 받아들여져야만 진정으로 주어질 수 있다. 성령 또한 일종의 소통 매체로서, 아버지께 메시지를 받아 아들에게 제공한다. 에고처럼 성령도 메시지를 보내는 자일 뿐만 아니라 받는 자기도 하다. 성령을 통해 보내진 것은 성령께 돌아오면서 그 과정에 자기 자신을 구하고, 또한 자신이 구하는 것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에고도 자신이 구하는 죽음을 찾아내서, 그것을 너에게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