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특별한 사랑 관계의 빈약한 매력에 항상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 너머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당기시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너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사랑은 없다. 다른 사랑이란 정녕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하게 주어지고 완전하게 돌아오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완전하기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전적으로 순수하기에, 그 안에서 결합된 모든 이는 모든 것을 가졌다. 이것은 에고가 시작하는 관계의 기반일 수 없다. 에고가 착수하는 모든 관계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만 관계를 맺으며, 죄의식을 사용하여 주는 자를 자신에게 묶어두려 한다.
66 에고는 어떤 관계도 분노 없이 시작할 수 없다. 에고는 분노가 친구를 만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정녕 에고의 목적이다. 에고는 죄의식을 느끼게 만듦으로써 무언가를 얻어내서 간직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고의 유일한 매력이다. 이것은 너무도 빈약한 매력이라서 무언가를 붙잡아 둘 힘이 전혀 없지만, 그런 사실을 인식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에고는 항상 사랑을 통해 끌어당기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고가 죄의식을 통해 끌어당긴다는 것을 지각하는 자는 에고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67 죄의식의 병적인 매력은 있는 그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죄의식은 너에게 실제인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네가 죄의식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그에 대한 투자를 거둬들임으로써 죄의식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내려놓을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네가 죄의식의 매력을 가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단지, 죄의식의 정체를 직시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어둠 속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의식을 빛으로 가져올 때, 너는 네가 도대체 왜 죄의식을 원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눈을 뜨고 이것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고 해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와 같이 추한 것은 너의 거룩한 마음에 본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집주인은 이런 것에 진정으로 투자할 수 없다.
68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에고는 죄의식을 유지하고 증가시키려고 하지만, 자신이 너에게 하려는 짓을 네가 알아보지 못할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에고의 근본 교리는, 네가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것에서 너는 이미 벗어났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 누구도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에고의 생존은 네가 에고의 악의에서 면제된다고 믿는 데 달려있다. 따라서 에고는, 네가 만약 에고의 숙주가 되어준다면 자신이 품은 분노를 바깥을 향하게 하여 너를 보호해 주겠다고 조언한다. 그렇게 에고는 끝도 없고 보람도 없는 특별한 관계들의 사슬을 엮어나가기 시작한다. 그 관계들은 분노로 날조되었으며, 너 자신의 바깥에다 분노를 더 많이 쏟아부을수록 네가 더 안전해진다는 단 하나의 미친 믿음에 바쳐졌다.
69 바로 이 사슬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을 죄의식에 옭아매는 것이며, 바로 이 사슬이야말로 성령이 그의 거룩한 마음에서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 야만적인 사슬은 하느님이 머무실 집주인으로 선택받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에고의 숙주로 만들 수 없다. 그의 해방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를 해방하고자 하는 성령의 이름으로, 에고가 궁리해 내는 관계들을 더 자세히 직시하고 성령께 그 정확한 판단을 맡기자. 그 관계들을 직시한다면, 너는 그것들을 기꺼이 성령께 드릴 것이 확실하다. 너는 성령이 그 관계들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모르지만, 먼저 네가 그 관계들로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기꺼이 지각하려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알아내려 할 것이다.
70 에고가 맺는 모든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에고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더 커진다는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다. 에고가 정화로 여기는 "희생"은 실제로 에고가 극심한 원한을 품게 만드는 근원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직접적으로 공격하여 자신이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을 즉시 얻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고는 자신이 보는 대로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 누구도 직접적인 공격을 사랑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 다른 사람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 직접적인 공격이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죄의식을 느끼는 자는 공격을 예상하며, 이렇게 공격을 요청했기에, 공격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71 이런 정신 나간 관계에서는,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의 매력이 네가 원하는 것의 매력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인다. 각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희생했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상대방을 증오한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과 사랑에 빠진 것이 전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희생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을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한 이 희생 때문에, 그는 상대방에게 죄의식을 받아들이고 그도 마찬가지로 희생을 하라고 요구한다. 이제 용서는 불가능해진다. 에고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곧 그를 잃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신의 모든 관계를 결속해 주는 죄의식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 없는 공격뿐이기 때문이다.
72 하지만 그들은 단지 함께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에고에게 관계란 그저 몸들이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요구하는 것은 항상 육체적인 친밀함이다. 그리고 에고는 마음이 어디를 가든 어떤 생각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보기에,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몸이 곁에 있어서 에고의 희생을 받는 한, 에고는 만족한다. 에고에게 마음은 사적이며, 몸만이 공유될 수 있다.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에고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다른 이의 몸을 가까이 끌어오거나 멀리 밀어내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에고는 아이디어를 이런 측면에서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한다. 다른 이를 죄 있게 만들어서 죄의식을 통해 잡아둘 수 있는 아이디어는 "좋다." 그를 죄의식에서 해방하는 아이디어는 "나쁘다." 그러면 상대방은 더 이상 몸들이 소통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73 고통과 희생은 에고가 모든 연합을 "축복하려는" 선물이다. 그리고 에고의 제단에서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연합의 대가로 고통과 희생을 받아들인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태어났지만 외로움을 지속시키는 데 바쳐진 분노의 동맹 속에서, 그들은 상대방 안에서 죄의식을 증가시킴으로써 자신은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 안에서 죄의식을 줄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항상 그들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사소하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럴 수 있지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잊지 않는다. 에고의 제단에서 결합된 자들의 격렬한 분노는 네가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너는 에고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74 분노에 휩싸일 때마다, 너는 에고가 "축복한" 특별한 관계를 맺었음을 확신해도 좋다. 분노는 정녕 에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많은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분노는, 사랑은 결코 죄의식을 일으키지 않으며, 죄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분노일 수밖에 없음을 배우려는 자를 오래 속일 수는 없다. 모든 분노는 단지 누군가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에고가 특별한 관계를 위해 받아들이는 유일한 근거다. 죄의식은 에고가 가진 유일한 필요다. 그리고 네가 에고와 동일시하는 한, 계속 죄의식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75 하지만 몸과 함께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소통에 죄의식을 느낄 것이며, 성령의 음성에서 소통해야 할 너 자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는 그 음성을 듣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성령은 두려움을 통해 가르칠 수 없다. 소통이
너 자신을 홀로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한, 성령이 어떻게 너와 소통할 수 있겠는가? 소통을 통해 네가 버려질 것이라는 믿음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너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너는 너의 마음을 사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몸들이 함께 있으면 마음은 계속 네 것으로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들의 연합은 네가 마음들을 떼어두는 방법이 된다. 왜냐하면, 몸들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들은 단지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만 행할 수 있을 뿐이다.
76 몸이 자율적이고 외로움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다는 환상은 단지 자신의 자율성을 확립하려는 에고의 계획이 작동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몸과 함께 있는 것이 교제라고 생각하는 한, 너는 부득이 네 형제를 그의 몸에 가두어 죄의식으로 묶어두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너는 죄의식에서 안전을 보고 소통에서 위험을 볼 것이다. 에고는 항상 외로움은 죄의식에 의해 해결되고, 소통은 외로움의 원인이라고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레슨의 명백한 광기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동안 그것을 배웠다.
77 저주가 죄의식 안에 놓여있듯이 확실하게, 용서는 소통 안에 놓여있다. 소통이 저주라고 믿는 자에게 소통은 구원임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교수 기능이다. 그리고 성령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성령 안에 있는, 그리고 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권능이 진정한 관계 안에서 결합하였기 때문이다. 그 권능은 너무도 거룩하고 강력해서 그러한 믿음조차 두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다. 거룩한 순간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성취되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거룩한 순간에는, 죄의식이 아무런 매력도 갖지 못한다. 소통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통의 중단이 유일한 목적인 죄의식은 여기서 아무런 기능도 없다.
78 여기에는 은폐도 없고, 사적인 생각도 없다. 소통하려는 용의가 거룩한 순간으로 소통을 끌어당겨서 외로움을 완전히 극복한다. 여기에 완전한 용서가 있다. 너는 다른 사람이 너의 완성에서 차지하는 역할의 가치를 갑자기 인식하여, 그 누구도 너의 완성에서 배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의 온전성의 보호 안으로, 모든 이가 초대받아 반가이 맞아들여진다. 그리고 너는 너의 완성이 곧 하느님의 완성임을 이해한다. 하느님의 유일한 필요는 네가 완성되게 하는 것뿐이다. 너의 완성은 네가 하느님의 완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너는 너 자신을 창조된 그대로,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