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가 함께 하는 여정은 어둠을 빛으로, 무지를 이해로 맞바꾸는 것이다. 네가 이해한 대상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너는 오로지 어둠과 무지 속에서만 무서운 것을 지각하며, 그로부터 움츠러들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춰진 것뿐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두려운 것이어서가 아니라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것이 두렵게 하는 이유는 네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명백할 것이며,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감춰진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감춰진 것은 공유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가치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감춰진 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가치라는 것은 항상 공동으로 진가를 인정한 것에만 놓여있다. 은폐된 것은 사랑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17 네 안에서 성령이 머무는 조용한 빛은 단지 완벽한 열려있음일 뿐이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감춰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공격을 사랑으로부터 감추지 않고 가져가면, 공격은 항상 사랑에게 굴복할 것이다. 어둠을 사랑의 자비로부터 은폐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빛이 물리치지 못할 어둠이란 없다. 사랑과 떼어놓은 것은 사랑의 치유력을 공유할 수 없다. 그것은 분리되어 어둠 속에 보관되기 때문이다. 어둠의 파수꾼들이 그것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며, 무를 가지고 이런 환상의 수호자들을 만들어낸 너는 이제 그들을 두려워한다.
18 이렇게 이상한 안전이라는 아이디어들에, 너는 계속해서 가공의 힘을 부여하고자 하는가? 그 아이디어들은 안전하지도 않고 안전하지 않지도 않다. 그것들은 보호해 주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기에,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둠과 무지를 지키는 수호자들인 그것들에게, 오로지 두려움만 기대하라. 그것들이 가리고 있는 것은 정녕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내버리면, 전에는 두려웠던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다. 가려서 보호하는 것이 없다면, 오로지 사랑의 빛만 남는다. 오로지 이것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이것만이 빛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19 죽음이 생명에게 굴복하는 이유는 단순히 말해, 파괴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 없음의 빛은 죄의식을 밝혀 물리친다. 그 둘을 같이 놓으면, 하나의 진리가 그 반대의 것의 거짓을 아주 뚜렷이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죄의식과 죄 없음을 떼어놓지 말라. 둘 다 가질 수 있다는 너의 믿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떼어놓음으로써 네가 한 것이라고는, 그것들을 서로 혼동하여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 전부다. 따라서 너는 오로지 하나만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종류의 의미도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20 너는 분리를, 아버지와의 소통을 단절하려고 만든 수단으로 해석했다. 성령은 분리를,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가려진 것을 재확립하는 수단으로 재해석한다. 네가 만든 모든 것은 성령의 가장 거룩한 목적에 기여하는 용도가 있다. 그는 네가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지만, 너로 하여금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을 너의 마음에서 지각한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이 모든 것을, 성령은 너의 마음으로부터 분리해 내고자 한다. 네가 창조 능력 대신에 만든 결정 능력을, 성령은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한다. 너는 너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결정 능력을 만들었지만, 이제 그것을 회복이라는 거룩한 대의를 위해 사용하는 법을 성령께 배워야 한다.
21 너는 어둡고 빗나간 상징으로 말하기에, 네가 만든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언어는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의 목적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목적이 소통이라면, 도대체 이런 언어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언어를 해석하는 자가 그 언어를 만든 자가 아니라면, 심지어 소통하지 않음으로써 소통하려는 이런 이상하고 왜곡된 노력 안에도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언어를 만든 너는 단지 갈등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만, 성령은 너를 그 갈등에서 해방하고자 한다. 네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을 성령께 맡겨라. 성령은 그것을 너에게 완벽한 명료함으로 해석해 줄 것이다. 성령은 네가 정녕 성령과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22 너는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너에게 무엇이 말해지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너의 해석자는 너의 이질적인 언어에 담긴 의미를 지각한다. 성령은 의미 없는 것을 소통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의미를 가진 모든 것을 가려내고 나머지는 버려서, 너와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네가 진정으로 소통하려는 내용을 제공할 것이다. 너는 동시에 두 가지 언어를 말하며, 이것은 이해 불능 상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언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언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면, 소통의 목적을 위해서는 후자만을 쓸 수 있다. 전자는 단지 소통을 방해할 뿐이다.
23 성령의 기능은 오로지 소통이다. 따라서 성령은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방해의 근원도 성령께 숨기지 말라. 성령은 너의 파수꾼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을 성령께 데려가라. 그리고 빛 속에서 보면 그들은 두렵지 않으며, 그 뒤로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어두운 문을 지킬 수 없다는 성령의 온유한 가르침을 받아라. 우리는 문을 모두 열어젖혀 빛이 흘러들게 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원에 감춰진 방이란 없다. 그 사원의 문은 활짝 열려 하느님의 아들을 맞이한다. 아버지가 반가이 맞이하시는 곳으로 가는 문을 스스로 닫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느님이 불러들이신 곳으로 가지 못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