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면, 공격할 수 없다. 정죄는 공격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정죄는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사랑받을 가치가 없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내리는 판단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분열이 있다. 판단하는 마음은 자신이 판단받는 마음과 분리되었다고 지각하며, 다른 마음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은 처벌을 면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한 다음에, 그러한 부정에 대한 처벌을 면하려는 망상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부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에 매달리려는 시도다. 죄의식이야말로 아버지를 너에게 가리고, 너를 정신이상으로 몰고 간 것이다.
86 하느님의 아들이 마음 안으로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분리의 끝이듯, 죄의식을 받아들인 것이 분리의 시작이었다. 네가 보는 세상은 죄의식 때문에 미친 자들의 망상체계다. 이 세상을 잘 살펴본다면, 이것이 그러함을 깨달을 것이다. 이 세상은 처벌의 상징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모든 법칙은 죽음의 법칙이다. 아이들은 고통을 통해 고통 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들의 성장에는 고난이 동반하며, 그들은 슬픔과 분리와 죽음에 대해 배운다. 그들의 마음은 뇌에 갇혀있으며, 몸이 손상되면 뇌의 능력도 쇠퇴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듯하지만, 버리고 버림받는다. 그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는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는 가장 정신 나간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몸은 시들어 간신히 숨을 잇다가 땅에 눕혀져 더 이상 없는 듯하다. 그들 가운데 하느님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87 만약 이것이 실재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정녕 잔인한 분이시리라. 자식에게 구원의 대가로 이런 일을 겪게 하는 아버지를 자애롭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구원하기 위해 죽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공격이 곧 구원이겠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해석이 아닌 에고의 해석이다. 오로지 죄의식의 세상만이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오로지 죄의식을 느끼는 자들만이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을 낙원에서 내쫓은 분이 아버지라고 믿지 않았다면, 아담의 "죄"는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앎이 상실되었다. 오로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그렇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88 이 세상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림이다. 그리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음을 깨달을 때까지, 이것이 바로 네가 볼 세상이다. 하지만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 죄가 없다는 영원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로지 사랑만을 주었으므로, 오로지 사랑만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결코 정죄한 적이 없으므로, 정죄받을 수 없다. 속죄는 그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마지막 레슨이다. 속죄는 그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기에 구원이 전혀 필요 없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89 오래전에 말했듯이, 성령은 모든 훌륭한 교사들의 목표를 공유한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그들 자신을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오로지 이것만을 뜻한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공유하는 성령은, 아들의 마음에서 모든 죄의식을 제거하여 그가 아버지를 평화 속에서 기억하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평화와 죄의식은 정반대이며, 따라서 아버지는 오로지 평화 속에서만 기억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죄의식은 공존할 수 없으며, 그중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너의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가린다. 죄의식은 하느님 아들의 결백함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90 네가 만든 이 이상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죄를 지었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그를 볼 수 있겠는가? 그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네가 받아들인 죄의식의 먹구름 속에 보복의 세상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너는 그 세상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스도의 결백함은 에고는 결코 없었고 결코 있을 수도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죄의식 없이는 생명을 가질 수 없고, 하느님의 아들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내가 전에 요청한 대로 너 자신을 돌아보고 너의 행위를 정직하게 판단할 때, 너에게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는지 의심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91 하지만, 다음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 너는 시간 안에서는 죄가 없지 않지만, 영원 안에서는 죄가 없다. 너는 과거에 "죄를 지었지만", 과거란 없다. 항상에는 방향이 없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이 보이지만, 네가 시간의 끝에 도달하면, 마치 네 뒤의 과거를 따라 깔아놓은 긴 카펫처럼 둘둘 말려 사라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 한, 너는 그 카펫이 죽음에 이른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따라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길고 잔인하고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그것은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92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에게 떠나게 한 여정은 참으로 어리석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떠나게 하시는 여정은 해방과 기쁨의 여정이다. 아버지는 잔인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없다. 그가 두려움에 떨며 보는 보복은 결코 그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보복을 믿을지라도, 성령은 그것이 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성령은 시간의 끝에 서있으며, 너도 분명 그곳에 있다. 그는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아들에게 합당치 않은 모든 것을 항상 무효화해 왔다. 그것은 하느님이 성령에게 주신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것은 항상 존재해 왔다.
93 하느님의 아들에게 죄가 없음을 배울 때, 너는 나를 볼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죄 없음을 구해왔으며, 그것을 이미 발견했다. 누구나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해방을 찾을 길은 그에게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은 그의 내면에 있기에, 그는 그것을 이미 발견했다. 그가 언제 그 길을 발견할 것인지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시간은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아들은 지금 죄가 없으며, 그의 눈부신 순수함은 손상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빛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항상 그가 창조된 그대로일 것이다. 너의 세상을 부정하고, 그를 판단하지 말라. 그의 영원한 죄 없음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으면서 그를 영원히 보호하기 때문이다.
94 네가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였을 때, 하느님의 아들 안에 죄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오로지 죄 없다고 볼 때만, 너는 그의 하나인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죄라는 아이디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일으켜서, 통합 대신 분리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너는 오로지 너 자신만 정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정녕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더없이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존재의 조건이지만, 너는 그동안 그것을 부정했다. 사랑으로부터 그가 창조되었고, 사랑 안에 그가 머물러 산다. 선과 자비가 항상 그를 따랐다. 그는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95 너와 함께 여행하는 거룩한 동반자들을 지각할 때, 너는 여정이란 것은 없으며 오로지 깨어남만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잠들어 있지 않으며, 너를 위해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왔다. 여행할 길도 없고, 여행에 걸리는 시간도 없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시간 안에서 기다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들 없이 계시기를 영원히 뜻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그러했다. 너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죄의식의 구름을 하느님 아들의 거룩함이 밝혀 물리치게 하고, 그의 순수를 네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정녕 너의 순수임을 그로부터 배워라.
96 너는 죄가 없기 때문에, 상처받을 수 없다. 너는 오로지 죄의식을 통해서만 과거에 매달릴 수 있다. 죄의식은 네가 과거에 행한 것 때문에 처벌받을 것임을 입증하며, 따라서 과거에서 미래로 진행하는 일차원적인 시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는 자라면 그 누구도 항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죄의식은 너에게서 영원에 대한 이해를 앗아갈 수밖에 없다. 너는 영원하기 때문에 불멸이며, 항상은 지금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죄의식은 에고의 연속성을 보장하려고 너의 마음에 과거와 미래를 붙잡아두는 방법이다. 과거에 있던 것이 미래에 처벌받는다면, 에고의 연속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에고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불멸은 시간의 반대다. 시간은 지나가 버리지만, 불멸은 끊임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97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에게 불멸이 정녕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너 자신의 죄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너는 과거가 존재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미래도 불필요함을 배우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서 미래는 항상 죄 갚음과 관련되며, 오로지 죄의식만이 죄 갚음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들의 죄 없음을 네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이 너에게 당신의 아들에 대해, 그리고 그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일깨워 주려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분은 결코 당신의 아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며, 그는 죄가 없기에 정녕 영원하다.
98 죄의식을 실재화한 다음에 속죄하는 방법으로는 죄의식을 물리칠 수 없다. 이것은 에고의 계획으로서, 에고는 죄의식을 물리치는 대신에 그런 계획을 제공한다. 에고는 공격을 통한 속죄를 믿는다. 에고는 공격이 곧 구원이라는 미친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죄의식을 애지중지하는 너 또한 이것을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에고와 동일시하지 않고서야 네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어찌 그리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99 에고는 네가 유죄이며, 그러니 너 자신을 공격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의식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죄의식은 공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고의 가르침에는 죄의식에서 탈출할 길이 전혀 없다. 공격은 죄의식을 실재화하며, 만약 죄의식이 실재한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단지, 죄의식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조용한 인식을 통해 죄의식을 물리친다. 성령은 하느님의 죄 없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진실임을 안다. 그리고 이것은 너에게 해당하는 진실이기에, 너는 너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 죄의식이 없다면, 공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정녕 구원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더없이 순수하기에, 정녕 상처받을 수 없다.